정조는 정약용을 무척 아꼈는데, 정약용이 여러 방면에서 출중한 실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재다능한 정약용에게도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종교였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인데, 정약용 집안은 천주교를 믿었습니다. 정약용을 시기하는 사람들은 그의 종교를 빌미 삼아 상소를 올리며 공격합니다. 정조는 계속해서 올라오는 정약용에 대한 탄핵 상소를 외면할 수 없어서 정약용을 보호하기 위해 잠시 그를 물러나게 합니다. 정약용은 정조의 편지를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고, 정조가 다시 자신을 불러줄 날만 기다리며 지냅니다. 정약용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는 문구가 있는데, 정약용 집의 ‘여유당’(與猶堂)이란 현판입니다.
‘여유(與猶)’는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여유는 겨울에 얼어붙은 시내를 조심스럽게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경계하라는 의미입니다. 정약용 주변에는 그의 약점을 잡아 완전히 퇴출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정약용은 날마다 사방을 경계하며 신중하게 보내야 된다는 의미로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걸고 생활했습니다. 정조 사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했고, 정약용은 유배를 갔습니다. 정약용 가문은 폐족이 됐고, 정약용은 18년간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18년을 보낼 때,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기 보다는 오히려 어느 때보다 신중하고 성실하게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유배생활 18년 동안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 권의 책을 썼습니다.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쓴 편지가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바라노니, 항상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가져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다름없이 하라. 하늘의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라서, 한번 쓰러졌다 하여 결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정약용은 폐족 신분이 된 아들들에게도 여유(與猶)의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을 당부합니다. 정약용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당부대로 살아 큰아들 정학연은 70세에 벼슬을 얻어 드디어 정약용 집안은 폐족을 면하게 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사단은 성도를 넘어트리기 위해 우는 사자같이 달려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마음에 ‘여유당’ 현판을 걸고 생활하는 것은 어떨까요?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중하게 생각하고, 죄를 경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